← Back to Work

글쓴이: 강정아
주최·주관: 미학관
Year
2024
Scope
external
사회적 재난이라고 일컬을 때, 사회가 맞닥뜨린 재난은 무엇인가. 사회적 재난은 자연재해와 다르게 눈에 보이지 않는 유형으로 여겨지는 경우가 많다. 자연적 재난은 지진, 태풍, 기후 등을 예로 들 수 있는데, 이 재난이 등장했을 때 가해지는 위력은 아무리 대응한다고 하여도 인간은 그 앞에서 나약하기 마련이다. 통제 불능의 위험 요소를 줄이기 위해 인간의 기술은 고도화되었고, 안전, 굶주림, 에너지 등 자원을 통제하는 전 지구적 시스템이 이를 보여준다. 자연에 대한 경외와 더불어 공포심은 인간 사회 전반의 지대한 영향을 끼쳐왔고, 자연을 제압하기 위한 과학기술은 자동화ㆍ기계화ㆍ대량화를 구축하여 변수를 통제하는 시스템을 강화한다.
예기치 못한 위협을 가져오는 자연을 상대로 인류의 통제 시스템이 더욱 견고해진다면 우리 삶은 더 안정적여야 할 것이다. 사회에 대항하는 위협 요소를 제거하고 변수를 제어하는 조직을 강화할 수 있다면 안락함을 유지하기란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모든 일은 그리 흘러가지 않다는 사실을 말이다. 만약 에노스적 인간이 지구를 완전한 제압에 성공하였다면, 더 이상 자연 재난은 불가능하지 않는가. 인간 목적론적으로 재배치된 지구-자원은 이른바 ‘사회적인 것’으로 관리된다. 오늘날 자연적 재난과 사회적 재난을 구분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코로나 팬데믹이 우리 사회의 민낯을 드러나게 했던 것은 재난이 계급적이고 차별적으로 나타난다는 사실이다. 자신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도 모른 채 겪게 되는 사회적 재난은 불특정 다수에게 무작위로 일어나지 않는다. 사회적 재난은 체계적 시스템에 의해 통제되며 피해 계층은 선별된다.
세계시민주의는 모든 인간이 태어남과 동시에 권리를 갖는다고 말한다. 인간은 생득적인 권리를 지닌 채 상호주관적 공간에 함께 존재한다고 말이다. 이러한 사회는 각자 앞에 일어나는 상호작용이며 존재의 신호를 보내는 일을 한다. 하지만, 이 신호의 접근은 영토-행정-군사권이 국가에 의해서만 시행됨에 따라 결정된다. 전례 없는 전쟁과 학살은 그간 세계를 받쳤던 인간에 대한 믿음을 무너뜨렸다. 천부적인 권리체라 믿었던 인간은 국가를 벗어나자마자 그저 ‘맨 인간’이 된다. 연약하기 그지없고 어느 생명체보다도 한갓된 숨, 나약한 인간을 향해 총구를 겨눈다.
팬데믹 이후 급속도로 벌어진 양극화는 국가-자본에 의한 사회 인프라 침식을 가속화했다. 자본의 증식에 기여할 수 없는 자들은 인프라가 약속하는 최소주의조차 누릴 수 없게 됐다. 그 과정에서 노동하는 몸의 식민화, 국가 기후 위기의 불평등과 환경파괴, 바이러스로 인한 생(명)계위기 등이 나타난다. 그러나 이 위기는 시스템에 의해 충분히 관리·감독받는 재난이다. 위기 이후에 찾아오는 재난, 관리할수록 우리를 역습하는 재난,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재난이다.
전시 <MAY DAY MAY DAY MAY DAY>의 ‘메이데이(Mayday)’는 국제 조난신호를 의미하면서 노동절을 뜻하는 메이데이(May Day)를 연상시킨다. 따지고 보면, 둘 간의 언어적 용어의 연관성은 크게 없지만 그렇다고 관계가 없는 것도 아니다. 이슬비 총괄 기획자가 서문에 밝힌 바와 같이 노동절을 뜻하는 메이데이를 구분하기 위해 음절을 세 번 반복하지만, 프랑스어의 메데(m'aider)의 뜻인 ‘도와주세요’와 비슷한 영어 발음인 메이데이가 잘못 대입된 것이다. 그러나 오해와 오독에 의한 구조신호의 작동은 의미심장하다. 구조신호의 알레고리가 난청, 이명, 환청 같은 주어진 상황에서 미끄러지는 언어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긴박하고 시급한 목소리는 직선이 아니라 사선으로 다가올 것이다. 또한 전시는 제목을 대문자로 표기하면서 그 뜻과 의미가 어디로, 누구에게 향해 있는지 방향성에 대해 문제화를 한다. 긴급한 상황에서 언어의 기능은 미끄러지지만, 그 뜻이 완벽한 불협을 끌어내지 않음을 가시화한다. 도와달라는 메이데이의 프랑스어와 노동절을 뜻하는 영어의 ‘메이데이’ 사이에는 절박함이 담겨있다. 자기 자신을 구조해달라는 요청과 살기 위해 구조를 바꾸려는 투쟁에는 사람의 자리를 염원하는 절실함이 담겨있다. 전시는 재난의 일상화, 일상을 대하는 태도, 재난을 형성하는 필연성에 주목한다. 그리고 재난의 공공화를 제안한다.
산업혁명 이후 열악한 노동자의 권익과 복지를 위해 제정된 ‘노동자의 날'은 1886년 미국에서 일어난 노동자 시위 헤이마켓(Haymarket affair)에서 비롯되었다. 유혈사태를 초래한 이 사건은 훗날 ‘8시간 노동제’를 도입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 권리를 위한 권리를 제창하기 위해 목숨을 걸었던 역사는 백 년이 지난 21세기에도 여전히 유효한 문제이다. 한국의 노동운동은 자본주의, 공산주의의 이데올로기 대립이 첨예하며 박정희 정권에서 노동절을 근로자의 날로 제정한 것은 노동을 국가 통제 아래 관리한다는 속뜻을 내포하기도 한다. 근로 노동에 포섭될 수 없는 노동에 대한 정의(시간, 장소, 생산성)가 오늘날 첨예한 문제로 불거지고 있다. 기술로 인한 시스템의 패러다임은 플랫폼 노동시장의 확장과 인간 노동의 소외를 가져온다. 플랫폼 노동이 산업시장에 큰 비중으로 차지하고 있는 상황에서 근로와 노동의 분류는 정치적일 수밖에 없다.
치명타의 <코팡 물류센터>(2020)와 <고슴도치와 투지의 시간여행자>(2020)는 영국의 백인 중산층 가족을 다양한 동물 모델로 한 완구제품 ‘실바니안 패밀리’을 통해 현대사회의 노동과 소외를 패러디한다. 2014년 좀비참사를 추모하는 포스터가 영상의 시작을 알리며, 등장인물인 비버씨는 ‘사건’이 일어나기 전으로 시간여행을 하기 위해 타임캡슐을 만든다. 하지만 개발비는 커녕 생활비도 남아있지 않게 되면서 고된 노동을 해야 하는 코팡 물류센터에 비정규직으로 취직한다. 물류배송을 제때 하지 못하여 과도한 업무로 목숨을 잃었다는 뉴스 기사의 사안은 8시간 노동시간을 외쳤던 19세기와 다르지 않다. 노동‘인’ 것과 노동 ‘아닌’ 것의 분류는 조건화된 증명을 요구한다. 노동하지 않는 몸의 재난(노동을 증명하지 못하는 자는 (좀비) 재난을 겪는다), 노동하는 몸의 재난(과도한 노동에 의한 과로사), 끝없이 반복되는 재난의 필연성을 막기 위해 끊임없이 시간을 되돌리지만, 그 모든 과정에 재난은 시간 속에 얽혀 들어간다. 이미 일어난 사건은 시간과 공간/장소를 벗어난 모든 존재와 연루된다. 그의 <재난 위장술1-3>(2024)은 재난을 안다는 것은 재난으로 인해 반드시 무언가를 잃어야지만 드러난다는 사실을 가시화한다.
고통과 폭력을 당한 자가 겪는 슬픔은 경험하지 않고서는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그들의 슬픔과 일상의 습격 앞에 자신은 안온하다는 사실에 대한 안도감을 지워버릴 수 없을 것이다. 타자의 고통에 다가가는 일은 위협받고 싶지 않다는 불안과 함께 시작된다. 송수민의 <하얀 조각>(2024)과 <하얀 덩어리>(2024) 작품은 삶의 유한성을 드러내며 그것이 영원하지 않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일상은 얼핏 볼 때 평화로워 보이지만, 일상을 뒤덮고 있는 환경은 주변화된 크고 작은 사건에 영향을 미친다. 송수민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세계 이면을 감각하기 위한 방법론으로 ‘응시’를 고안한다. 응시는 일종의 사물을 관찰하는 것으로 작품으로 묘사하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선행해야 하는 일일 것이다. 하지만 그 응시란 한 곳을 주의 깊게 관찰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보이는 것’을 보기 위해 ‘볼 수 없는 맹점’을 조망하는 일이다.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물질(色)은 없으며 연기(緣起)는 모든 물질이 지닌 조건 그 자체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이 서로 유기적으로 연루되어 있다는 것은 앞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사건’과도 관계한다. 우연히 일어나는 일은 없다. 과거와 미래를 망라하는 필연성을 기반한 현상이 어떻게 우리 삶과 연루되고 있는가에 대해 주목하기 위해서는 정혜정의 <멍게-되기>(2022)와 <스크린>(2024)의 작품을 유심히 바라볼 필요가 있다.
정혜정의 작업 세계에서 가장 주요하게 다뤄지는 것은 ‘물(物)’이다. 경계 안팎을 횡단하기 용이한 이 물질은 몸을 경유해 외부 바깥으로 나아가기를 시도한다. '눈'이라는 감각기관은 본다는 감각을 인지하며 이를 안근(眼根)이라 부른다. 이러한 감각능력의 지각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구분지으며 보이지 않는 것을 사유하는 것을 제한한다. 기관의 능력을 인지하고 의식하는 '나'가 아닌, 물질이 나를 투영하는 것. 정혜정에게 '물'은 일종의 나와 나 아닌 것, 차이를 지닌 타자성을 감각하는 일이다. 이것을 들뢰즈의 되기와 도나 해러웨이의 「해러웨이 선언문」에서 연결성을 찾을 수 있다. 서로 다른 이질성이 교합하는 것이 아닌, 차이의 혼종성이 지닌 연대를 부르며 나와 가장 멀리 존재하는 것이 머무르는 장소를 소환한다. <멍게-되기>는 VR의 프로그램을 사용하여 시각을 배제한다. 하나의 감각기능을 잃음으로써 타자의 접촉지대에 가까이 다가서며 이질적인 것이 만나는 이곳은 ‘되기’의 공간이다. 이런 의미에서 상호 공간을 침투한다는 것은 그 무엇이 아닌 것이어야 할 때, 살아있거나 죽어있거나 화면 안팎이거나 존재하거나 존재하지 않을 때 양극단의 상황이 경계에 놓임으로써 가능해진다. 정혜정은 이질성을 동반한 몸과 공간을 투사시키며 자연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의 구분을 흩트려놓는다. 이것은 이분법적으로 구분된 세계관을 환기할 중요한 방법론이다.
송수민과 정혜정의 작품을 통해 인식과 사유, 맹점의 공간 확장성을 가져보았다면 그 이야기를 다시 피부에 와닿는 터전의 문제로 연결해 보자. 국가 체계가 붕괴하거나 재편됨에 따라 공동체의 일원이 될 자격을 잃은 박탈된 상태의 경계인에 대해 주목하는 송성진의 작품은 오늘날 국가, 민족, 인종은 사회적 지위로 연결된다. 법 앞에서 평등할 수 있는 주권이 없다는 것은 사회 안에서 유령화가 되는 일을 뜻한다. 이 유령은 난민의 옷을 빌려 입고 있다. 한 공간에 있지만 지위를 보장하는 조건이 다르다는 이유는 언제나 이들을 타자화로 전락시킨다. 유령의 권리는 언제나 지연된다. 주권을 잃은 자의 재난은 언제 끝날지 모른다. 송성진은 이방인으로 살아가는 이들의 위태로움을 그려낸다. 하지만, 이들의 위기를 불안함으로만 그려내지 않는다. <자세들-매달리기>(2017-2018) 작품은 높은 층고를 지닌 전시장의 천장 구조물에 매달려 있는 현수막은 시선을 압도한다. 생명줄로 잡고 있는 끈을 놓쳐 절벽 아래로 떨어질 것 같은 아슬함에서 절대 놓지 않으리라는 의지적 얼굴과 거침없는 생명력이 느껴진다. 이 땅에 모두 존재하는 것들은 중력의 영향을 받지 않은 자는 없을 것이다. 지구와 공존하며, 있는 힘껏 땅에 의지하여 살아간다는 것은 생명이 지닌 필연성일 것이다. 송성진의 <1평조차>(2018) 작품은 갯벌에 연약한 한 평짜리 집을 짓는다. 밀물과 썰물로 떠밀려오는 위태로움을 보여주면서도 한 평짜리 집을 소유할 수 없는 현대사회와 다를 바 없음을 은유한다. 이 한 평짜리 집을 구성하고 있는 집기는 재개발 지역에서 작가가 모은 물품이다. 한때는 누군가의 살림살이가 바닷가 한 켠에 자리 잡는다.
몫이 없는 자들의 자리를 신자유주의나 자본주의에 따른 숙명론, 능력주의의 문제로 치부할 수 없다. 복잡한 이해관계로 얽혀있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을 시스템 통제화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확장한다면, 제 몫을 다하기 위한 노력은 때론 새로운 재난을 불러온다. 재난으로 인해 터전을 잃고 배제되는 경계인의 삶은 전쟁을 겪는 일과 같다. 1993년 제주 서귀포시 강정마을에 해군기지 건설 사업 논의가 시작되면서 2007년 이명박 정부에 와서 건설 추진을 공약했고, 2014년부터 본격적으로 사업이 추진되었다. 평화로웠던 강정마을은 기지 찬성과 반대파로 나뉘게 되면서 공동체가 와해됐다. 당시, 일부 언론은 주민들의 반대를 님비현상으로 규정하면서 공공성을 반하는 지역 이기주의로 강정의 활동을 보도하기도 했다. 2016년 해군기지는 준공되었지만, 여전히 강정마을의 평화운동은 지속되고 있다. 작가 흑표범의 <스틸, 강정>(2022) 작품은 강철(steel)을 뜻이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still)의 지속성으로 강정을 바라본다. 해군기지를 막기 위한 운동은 실패했지만, 해군기지와 함께 강정에서 살아간다. 강정에서 평화운동을 전개하는 활동가와 함께 해돋이를 목격하면서 시야를 가로막는 묵직한 강철(steel, still)은 긴 시간이 흘러도 존재할 것임을 예감하게 한다. 하지만 그것은 무기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파도에 밀려 떠밀려온 잔해가 바다를 뒤덮는다. 아무도 자신의 삶터가 무너짐을 바라는 자는 없을 것이다. 흑표범은 제안한다. “저쪽 앞, 태양을 보러 가보자.”
안내자의 목소리를 따른다. 정여름의 <조용한 선박들>(2023) 작품과 봄로야의 <연결통로 가이드의 하루>(2024) 작품에 등장하는 목소리는 사건을 겪은 타자의 경험을 대리한다. 말을 듣는다는 언어의 행위는 하기와 듣기의 상호작용이 가능하다는 조건일 때 성립이 가능할 것이다. 말하기는 말할 수 있는 능력을 뜻하기도 한다. 이런 의미에서 정여름과 봄로야는 스피박의『서발턴은 말할 수 있는가』(2013)를 충실히 수행하면서 듣기의 윤리를 요청한다. 정여름의 <조용한 선박들>은 베트남전과 케산전투(Battle of Khe Sanh)의 이미지를 강철로 통해 전한다. 강철을 품었던 시대가 땅 밑으로 진동하며 외부로 향했던 공격성이 내부의 저항력으로 내포된다는 사실로 장소성을 호출한다. 영상 속 강철은 세계를 구성하기 위한 중요한 매개체이다. 항공, 선박, 다리 등은 끊임없이 정치 경제를 위해 힘을 다져 왔지만 자연 앞에 강철은 언젠간 녹이 슬고 그 기능을 잃는다. 강인했던 강철은 적이 어디 있는지도 모르고 총알을 겨누었던 잔해더미가 되어 전쟁의 참혹함을 알린다. 정여름은 강철이 빚어낸 공허의 소리를 극대화하며 그 소리를 통해 고통을 발화할 수 없던 침묵의 흔적, 그늘진 자리를 드러낸다.
강철같은 존재가 이 땅을 가로막더라도, 끝내 밀려오고 쓸려오는 더미로부터 살아갈 초록이 있다. 초록은 최초의 목격자이자 증언자이다. 봄로야의 <연결통로 가이드의 하루>(2024)에서 작가는 직접 영상 속 나레이션과 화면에 관광명소를 소개하는 가이드로 등장한다. 빈 땅의 미래를 소개하는 듯한 가이드는 사람들이 이탈하지 않고 목적지까지 이동할 수 있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하지만, 가이드가 안내하는 곳은 재개발을 알리는 붉은 깃발이 표시된 땅이다. 빠르고 편한 교통의 요충지로서 용산역 일대를 거닐며 경제적 가치를 그려 보지만, 기약 없는 나대지는 어떤 기억을 품고 있다. 맥락없는 낙관화가 초래한 폭력이 어떤 죽음을 낳게 했는지, 용산 4구역 망루에서 울려 퍼진 소리를 땅이 듣고 있다. 가이드의 안내에 따라 보폭에 맞춰 따라 걷자, 그제야 보이지 않았던 투명한 집을 짓고 사는 이들을 발견한다. <유연한 손>(2022)과 <유연한 발>(2022) 작품은 취약한 타자로 홈리스를 호출한다. 거리에서 구걸의 도구가 된 손과 발의 증명들, 이들의 생명을 위한 신호는 연약하지만은 않다. 배제되거나 추방되어 도시 경계 안팎으로 거주하는 이들의 출현은 낯선 공포심을 일으킨다. 그리고 알고있다. 그 공포심 안에는 미약한 힘이 있다는 사실을. 그 힘은 이질적이고 연민의 대상이 되는 이들이 공론장 안으로 들어왔을 때 발생하는 ‘임계적 공공성'이다.
임계적 공공성은 김동규의 논문 「공공예술의 미학과 임계적 공공성」(2024)에서 밝힌 바가 있는데, 취약한 사람들이 기존의 문제를 공적인 것으로 드러내는 순간, 상처의 특이성에 특수성을 부과된다는 것을 전제하며 이것이 새로운 언어와 제도를 만드는 지대를 조성할 수 있음에 주목한다.
이는 다시 한번 우리에게 위협이 가해지는 ‘재난'을 재사유하기를 시도하는 방법을 제안하며 콜렉티브 리슨투더시티의 작품과도 연결된다. 리슨투더시티는 지속 불가능한 도시를 지속 가능하게 사유하기 위해 공통재(the commons)의 개념을 활동의 태도로 삼는다. 공통재는 인류가 축적되어 온 자산(흙, 공기, 물처럼 공동체에 속한 자원이자 역사, 언어, 지식 등 인류가 함께 만들어 다음 세대도 사용하는 모두의 것)1리슨투더시티 공식 스테이트먼트에서 발췌. https://www.listentothecity.org/About으로 전지구적 터전을 함부로 훼손할 수 없으며 그것을 사유하기 위한 공공의 장이 필요하다는 것을 고한다. <망각의 도시>(2022) 작품은 리슨투더시티의 활동에서 주요하게 다루는 청계천 을지로 재개발 지역의 현장을 덤덤히 그려낸다. 낙후된 건물을 허물고 포크레인이 땅을 파헤친다. 그 소리와 함께 한국의 제조업을 성행시킨 숙련된 기술자들의 손끝도 기계와 함께 맞물린다. 청계천 일대에 거주했던 판자촌이 밀려나고 주상복합건물로 세운 세운상가도 흉물로 전락한 후, 산업의 유행에 따라 아름답지 않은 것은 고물로 전락한다. 망각하는 인간은 저 자신을 품었던 땅마저 기억하지 못한다.
리슨투더시티에게 장소상실은 전쟁과 가까운 정치적 문제이고 재난과도 맞닿는 시급함이다. 인간에게 재난은 직접으로 가해지는 습격일 때야 깨닫고 자신이 피해자의 얼굴이 되었을 때, 그 슬픔의 의미를 알게된다. 자연 재해가 발생하는 지역이 특수적이라는 착각은 ‘나에게 일어나지 않은 일’로 치부하기 쉽다. 재해 이후 다시 삶을 일으키기 위한 맨손의 용기는 연대에서 시작한다. 리슨투더시티는 사회적 재난을 목격하며 재난의 위험을 경고함을 넘어 이 재난을 공공화로 사유하기를 제안한다. 재난을 사유한다는 의미는 바로 그 재난의 당사자가 우리가 될 수밖에 없음을 뜻하며 그 과정에는 반드시 폭력이 따른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일상의 안온함은 마침내 위험이 도래했을 때 알아차리는 것처럼 <After the Disaster 재난 이후 災害後>(2024) 작품의 도입부는 트라우마를 예고하는데, 트라우마가 발생할 것임을 우려하면서도 회피할 수 없는 진실을 말한다. 무방비한 상태에 삶을 상실한 사람들, 재난을 겪을 당사자가 아니길 바라는 마음. 상처 끝에 우리는 언제나 취약한 존재임을 깨닫는다. 그리고 그 취약함과 상처의 연민이 일상 속에서 안전지대를 찾게 한다.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고 텅 비어 있는 것들은 언제나 무언가를 담아내야 함을 요청받는다. 그 의미로 전시 <MAY DAY MAY DAY MAY DAY>는 우리가 모두 연약하고 상처받는 존재라는 절박한 사실을 알린다. 슬픔을 슬퍼하라. 함께 슬퍼하는 일은 슬픔에 따스함이 깃드는 일이다. 재난의 위협은 위기가 아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사유하고 그것이 연결되어 있음을 드러내는 일은 표백된 재난을 감각하는 일이다.
8명의 작가의 작품들이 마주하고 있는 ‘재난'은 갑자기 우연히 찾아오는 것이 아니다. 시공간을 초월한 재난의 고고학은 역사로 침잠되지 않으며 지구와 함께 태동한다. 일상화된 재난의 공포는 안전지대를 만들기 위한 노력으로 확장한다. 대규모 아파트 단지와 복합문화시설과 빠른 교통을 위해 땅 밑을 파헤친다. 그리고 그 땅 밑에는 잘 살기 위한 염원이 담겨 있다. 잘 살아간다는 것은 안전하게 거주할 권리, 정보를 제공받을 권리, 배제당하지 않고 차별당하지 않을 권리 등을 포함한다. 허나, 우리는 알고 있다. 하루아침 사이, 자신의 삶터를 상실한 사람들의 절규에 대해서, 망각된 인간이 저지르는 역사에 대해서. 우리 앞에 놓인 재난의 차, 차이로 인해 발생하는 재난이 우리를 공포심에 떨게 한다. 이 공포심이 나약한 인간에게 주어지는 가장 큰 형벌이며 동력이다.
참여작가|리슨투더시티, 봄로야, 송성진, 송수민, 정여름, 정혜정, 치명타, 흑표범
기획|이슬비
어시스턴트 큐레이터|박지예
프로젝트 매니저|김지현
설치|띵크앤메이크
장비|올미디어
그래픽디자인|파이카(이수향, 하지훈)
사진|뭉크스튜디오
주최주관|미학관
후원|문화체육관광부, (재)예술경영지원센터
협력|(재)수원문화재단